아버지 정기진료가 있는 날이다.
이틀 전에 있었던 정기검사는 동생이 모시고 왔기에
병원에서 인사만 드리고 작업실로 향했다.
오늘은 오전부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.
때마침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.
" 아버지 서울 도착했을끼다. 모시고 병원 대녀와라이~ "
" 엄마! 나 오늘 일찍 나가봐야 하는데, 동생은?"
" 집에 일이 바빠서 아버지 혼자 가셨다~"
" 내가 수요일에 분명 얘기했는데...그날 바쁘니까 모시고 올라와야 한다고..."
" 한 두시간 늦게 출근하면 안되나?"
" ...... "
대답없는 나와 엄마 사이에 3초간의 묵음.
" 며느리는? 가가 좀 늦게 출근하면 안되나?"
"......"
어려서부터 밴댕이 소갈딱지 라는 말을 들었던 나는 금새 호흡이 달라졌다.
아무것도 아닌 일인데...조금 늦게 일처리를 하면 되는 일인데...
결국 열린 입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 나왔다.
" 엄마... 이럴 때마다 정말 서운해..."
" 야...야... 내가 니한테 서운타. 그거 머가 어려운 일이라꼬... 한 두시간 늦게 가면 큰일 난다 카드나?"
엄마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내 말을 되받으셨다.
"......"
일곱살배기 딸녀석은 눈치도 없이 바로 내 앞에서 엄마의 새 아이폰4s 로 스누피 게임 삼매경이다.
" 알았어요. 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. 끊어요"
전화를 끊고 귀여운 딸녀석에게 소리를 버럭 ㅡ.ㅡ"
"게임 그만 해!!!!!!!!!!!!!!!!!!~~~~~~~~~~~~~~~~~~"
평소 딸바보 18단인 나, 갑작스런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애가 울음을 터뜨렸다.
"아빠 미워!!!"
순식간이었다.
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오전부터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들이
순식간에 엉켜버린 실타래가 되었다.
피곤에 절은 아내도 평소보다 더 늦게 아침을 맞고,
난 그 모습까지도 못 마땅해
집에 계속 있다가는 엉켜버린 실타래를 가위로
싹둑 잘라버리는 무식한 짓을 할 것 같았다.
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.
아파트 출입문을 나서자...
첫 눈이라고 하기엔 멋적은 눈싸라기들이 흩날린다.
잠시 서서 작업실로 향할 지 병원으로 향할 지
머뭇거렸다.
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.
" 바쁜데 왜 왔어..."
" 좀 늦게 가도 되요..."
무뚝뚝한 아버지는 큰아들이 옆에 있다는 게
내심 든든하신 눈치셨다.
내분비내과 담당의는 빈혈수치가 안좋아졌다며
신장내과 전문의에게 가서 조혈주사에 관한 상담을 받으라고 했다.
신장내과에 들려 진료를 받았는데, 다행히 큰 이상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.
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향하는 택시 안,
아버지와는 여느 때처럼 대화가 짧다.
저혈당 오기전에 식사를 하셔야 했기에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죽 집으로 향했다. 전복죽을 드신다길래 같은 걸로 두 그릇 주문했다. 두 남자는 여전히 죽 먹는데만 집중하고 대화는 없다.
식사를 마치고 13:00 시 발 제천행 우등 고속버스 표를 사서 아버지께 드렸다.
"아버지, 전 이제 늦어서 가봐야겠어요"
버스 타시는 모습까지 보고 작업실로 향하려했지만, 이젠 허락된 시간이 다 됐다.
"그래 어서 가..."
"나중에 작업실 구경 시켜드릴게요"
"그래..."
아버지는 22번 제천행 대기석에 나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.
사무실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머릿속에는 엄마와 딸 두 여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. 사무실에 도착해서 밀린 업무를 마치고,
오후로 미뤘던 업체 대표와의 미팅을 끝내고 난 후
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.
" 아버지 도착하셨어요? "
" 치과 들렀다 오신다고 아직... 다 왔다고 하시더라"
" 엄마! 아침에는 내가 밀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거니 서운해하지 마시고,
다음 번엔 제가 일이 있다고 미리 말씀드리면 동생이 모시고 다녀가셔야 해요."
" 그래...그러게 말이다"
" 끊을게요. 엄마..."
엄마의 찡그린 얼굴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.
다른 한 여인은 뽀뽀로 달래야겠다.


